빌 게이츠와 정기선. 원전 스타트업 창업자와 조선업 후계자가 14일 서울에서 손을 맞잡았다. 겉으로는 평범한 경영진 회동이지만, 그 이면에는 2022년부터 이어진 4년짜리 베팅이 걸려 있다. HD현대가 게이츠 소유 원전기업 테라파워의 지분을 사들인 지 4년 만에, 이제는 그 회사의 원자로를 직접 만드는 회사가 됐다는 얘기다.
자리에는 정기선 HD현대 회장과 빌 게이츠 테라파워 창업자 겸 회장 외에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CEO, 이한우 현대건설 대표까지 총 네 명이 모였다. 세 회사 최고경영진이 다 같이 얼굴을 맞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5월 HD현대·테라파워·현대건설이 나트륨 원자로 사업을 위한 3자 업무협약(MOU)을 맺은 지 약 석 달 만이다.
이날 테이블에 오른 의제는 나트륨 원자로의 육상 상용화였다. 세 회사의 역할은 이미 나뉘어 있다. 테라파워는 원자로 기술, HD현대는 주기기 제작, 현대건설은 설계·조달·시공(EPC)을 맡는 삼각 구도다.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기술, 제조, EPC를 아우르는 협력체계를 기반으로 차세대 원자로의 상용화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자체적인 기술 개발과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SMR 발전 수요 증가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투자자에서 제작사로 — HD현대가 걸어온 4년
이야기는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HD한국조선해양이 테라파워에 3000만달러를 투자하며 관계가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단순 지분 투자에 그칠 수 있었던 관계는 이후 구체적인 제작 계약으로 몸집을 키웠다.
2024년 12월, HD현대는 테라파워로부터 나트륨 원자로에 들어가는 원통형 원자로 용기 제작을 따냈다. 이듬해 3월에는 ‘나트륨 원자로 상업화를 위한 제조 공급망 확장 전략적 협약’을 맺고, 약 1년간 제조 타당성과 가격 경쟁력, 납기 등을 함께 들여다봤다.
그리고 올해 5월, HD현대는 나트륨 원자로 주기기 핵심 설비의 제작·공급 우선협상대상자로 낙점됐다. 같은 달 현대건설까지 판에 끼어들면서 ‘테라파워 기술 + HD현대 제조 + 현대건설 EPC’라는 지금의 3사 체계가 완성됐다. HD현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공급 범위를 구체화하는 동시에, 상용화 이후 원자로 용기를 연 2~3기 찍어낼 수 있는 생산 설비 투자까지 저울질하고 있다.

노림수는 미국 — 세계 최대 95GW 시장
세 회사가 우선 겨냥한 곳은 미국이다. 약 95GW에 달하는 미국의 원자력 발전 설비는 세계 최대 규모로, 전 세계 원전 설비의 4분의 1가량이 이곳에 몰려 있다. 1970년대 지어져 노후화된 원전이 수두룩한 데다, 데이터센터가 우후죽순 늘면서 전력 수요까지 치솟고 있는 게 배경이다. 테라파워는 소듐냉각고속로(SFR) 방식의 차세대 SMR ‘나트륨(Natrium)’을 앞세워 이 틈을 파고들고 있다.
HD현대로서는 조선·해양 사업에서 쌓은 대형 구조물 제작 노하우를 원전 주기기 시장으로 옮기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분 투자로 시작해 원자로 용기 수주까지 온 이 관계는, 이제 핵심 설비 공급 범위와 생산 설비 투자를 놓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중이다.